매달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고, 다음 직장을 언제 구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 있다면 결정은 더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퇴사’를 직장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 직장인의 경력을 지켜보
면서 저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회사를 나오는 일이 아니라, 회사를 계속 다니는 동안 내 경력이 멈춰버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출근도 잘하고, 맡은 업무도 무리 없이 처리합니다. 상사와 특별히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당장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안정적인 직장생활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문제가 드러납니다.
최근 3년 동안 새롭게 써넣을 만한 경험이 없습니다. 업무는 늘었지만 책임 범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성과라고 부를 만한 결과도 선명하지 않습니다. 채용공고를 찾아보니 내가 해온 일을 필요로 하는 회사도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회사에는 분명히 다니고 있는데, 경력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한 권태기나 매너리즘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커리어 정체는 시장에서 내 선택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직장을 지키는 것과 경력을 지키는 것은 다릅니다
직장에 오래 다니면 경력도 자연스럽게 쌓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 과거에는 근속연수가 곧 경험의 깊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회사에서 오래 버틴 사람은 그만큼 전문성이 쌓였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조직에서 10년을 일했더라도 같은 수준의 일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다면, 외부 채용시장에서는 10년의 경력보다 ‘1년의 경험을 열 번 반복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직급이 크게 오르지 않았더라도 더 어려운 고객을 담당하고, 여러 부서를 조율하고, 중요한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에 참여했다면 그 사람의 경력은 분명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명함에 적힌 직급이나 근속연수가 아닙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해결하는 문제의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의사결정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졌는지, 그리고 내 경험이 다른 조직에서도 통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직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력까지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이 편해졌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업무가 익숙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하면 속도도 빨라지고 실수도 줄어듭니다. 숙련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지나치게 익숙해졌다면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나는 일이 거의 없고, 새로운 판단을 내려야 할 상황도 없으며, 몇 년째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결과를 만들고 있다면 나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능숙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업무를 정확히 알고, 사고를 치지 않으며, 별도의 설명 없이도 일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직시장에서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어떤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면 현재 업무의 안정성과 별개로 경력은 정체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책임만 늘고 권한은 그대로라면 성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일이 계속 늘어납니다.
후배의 업무를 봐줘야 하고, 갑자기 생긴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며, 다른 부서가 놓친 일까지 대신 처리하게 됩니다.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지만 직급과 보상, 의사결정 권한은 그대로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회사가 나를 믿기 때문에 일을 많이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량이 늘어나는 것과 경력이 성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단순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졌을 뿐, 어떤 일을 할지 결정할 수 없고 자원이나 사람을 움직일 권한도 없다면 경력의 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장에서도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회사의 특정 시스템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평가는 조직 안에서는 강점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다른 회사에서도 통용되는 역량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치가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간다”는 말의 함정
직장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팀은 제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요.”
처음 들으면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고도의 전문성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복잡한 업무를 오랫동안 떠안고 있어서 필요한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회사 안에서만 이해되는 업무 방식과 관계, 오래된 관행을 관리하는 데 능숙해진 것이라면 외부 시장에서는 그 경험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력을 점검할 때 ‘회사에서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보다 다음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회사에서도 내 경험을 필요로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부 채용공고를 읽으면 내 경력의 현재 위치가 보입니다
당장 이직할 생각이 없더라도 채용공고는 주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채용공고는 단순히 사람을 뽑기 위한 안내문이 아닙니다. 시장이 지금 어떤 역량에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관심 있는 직무의 채용공고를 열 개 정도만 읽어봐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역량이 보입니다. 데이터 분석, 프로젝트 관리, 고객 경험, 프로세스 개선, 자동화, 이해관계자 조율처럼 시장이 원하는 능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내용을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업무와 비교하면 경력의 빈틈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채용공고의 절반 이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요구하는 역량과 내 경험을 연결하기 어렵다면 시장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장 현실적인 경고에 가깝습니다.
정체에서 벗어나는사람은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지 않습니다
커리어가 막혔다고 느끼면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개발을 배워야 할 것 같고, 대학원에 다시 가야 할 것 같고, 자격증도 여러 개 취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경력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경험을 버리는 것보다 현재 경험과 연결된 인접 직무를 찾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예를 들어 영업지원 업무를 해온 사람이라면 자신을 단순히 ‘영업지원 직원’이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했던 일을 나눠보면 고객 데이터 관리, 계약 조율, 매출 실적 분석, 영업 프로세스 운영,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 등의 역량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역량은 영업운영, 사업관리, 고객성공, 프로젝트 관리와 같은 직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행정 업무를 해온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서 작성과 일정 관리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자 조율, 예산 집행, 업무 프로세스 설계, 리스크 관리 경험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데이터 활용이나 프로세스 개선 역량을 보완하면 사업운영이나 경영관리 분야로 이동할 여지가 생깁니다.
정체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을 직함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해결해 온 문제와 보유한 역량을 기준으로 다음 경력을 설계합니다.
퇴사하기 전에 회사 안에서 작은 이동부터 만들어보세요
경력이 멈췄다고 느낀다고 해서 바로 퇴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먼저 현재 회사에서 이전과 다른 경험을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신규 사업을 맡지 않아도 됩니다. 반복해서 발생하는 문제 하나를 선택해 개선 프로젝트로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매번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작성 과정을 표준화할 수 있습니다. 부서 간 인수인계에서 오류가 반복된다면 체크리스트와 업무 흐름을 새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고객 문의가 계속 누적된다면 유형을 분류하고 대응 프로세스를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나 더 맡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제안하고, 실행을 이끌고, 결과를 숫자로 확인하는 경험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고서 작성 절차를 표준화해 월간 업무시간을 20시간 줄였다.”
“인수인계 체크리스트를 도입해 반복 오류를 30% 감소시켰다.”
“고객 문의 유형을 재분류해 평균 응답 시간을 이틀에서 하루로 단축했다.”
이런 경험은 현재 회사에서의 평가에도 도움이 되지만, 이직할 때는 더 강력한 경력 사례가 됩니다.
저는 경력을 점검할 때 최근 3년을 봅니다
커리어 정체가 의심된다면 최근 3년 동안 했던 업무와 프로젝트를 적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험에 네 가지 질문을 던져보세요.
무엇이 이전과 달라졌는가?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가?
숫자로 보여줄 결과가 있는가?
다른 회사에서도 필요로 할 경험인가?
여기에 답하기 어렵다면 경력을 다시 움직일 장치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새로운 자격증을 하나 더 찾는 것보다, 작은 개선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해보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관심 있는 인접 직무의 채용공고를 최소 열 개 정도 읽어보세요. 반복해서 등장하는 역량을 표시하고, 내가 이미 가진 경험과 아직 부족한 부분을 구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연하게 “뭔가 배워야 할 것 같다”는 불안이 “이 역량을 이런 프로젝트로 보완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뀝니다.
40대가 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은 직급이 아니라 이동 가능성입니다
특히 40대 커리어를 앞두고 있다면 현재 직장의 안정성만 볼 수는 없습니다.
연봉이 당장 줄지 않고 회사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는 이유로 안심하기 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직무 전환의 비용은 커집니다. 회사 안에서만 인정되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외부 시장에서 자신을 다시 설명하기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승진 여부만큼이나 ‘지금의 경험을 가지고 어디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현재 직무의 다음 단계가 보이는지, 인접 직무로 이동할 수 있는지, 내 성과를 시장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동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회사를 옮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는데 남는 것과, 갈 곳이 없어서 남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커리어 정체는 실패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경력이 멈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일했던 시간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나만 뒤처진 것 같고,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커리어 정체를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역할에서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공간이 많지 않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정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너무 늦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퇴사할 필요는 없을 수 있습니다.
다만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과 경력을 계속 성장시키는 일을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세요.
나는 지난 1년 동안 어떤 문제를 새롭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경력을 다시 움직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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